조현아
가.
이 글은 2023년부터 오늘까지, 약 1년여 간 남동아시아 시각예술을 공부하며 떠오른 생각을 짧은 호흡으로 기록한 비망록에 기초하고 있다. 갖은 요령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읽고 쓰기만을 수련한답시고 도모한 박치기와 구르기는, 『수상록(Essais)』(미셸 드 몽테뉴, 1580)을 상기시켰다.
나.
그러므로, 이 글은 전시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지도, 의제를 제공하는 논고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배움을 일지로 전환하며, 오역 이후의 남은 생각들이 휘발되지 않도록 붙잡은 닻의 구실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한보다 빠르게 세계적인 무대에 섰던 이웃 국가들의 전시사와 미술운동사를 개괄하는 글로부터 얻은 정보는 한국 문화가 배제해왔던 미술의 수원지가 많았다는 실정을 새삼 깨닫게 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필리핀 파빌리온이 1954년, 그러니까 대한민국 파빌리온보다 39년 먼저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나 1957년 남동아시아 각국이 모여 문화적 교류를 펼쳤던 《제1회 남동아시아 미술 전시회》가 국제적으로 미친 여파 등 열거할 수 없이 다양한 사건의 일부만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는 현실이, 가장 가까운 예시다.
2023년 7월 스터디 콜렉티브의 명칭을 AS로 정하며, 우리는 남동아시아 현대미술사 재편에 주력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가 발간한 서적에서 네 편의 논고를 먼저 골라 읽었다. 패트릭 D. 플로레스의 「자유의 조건, 예술의 가능성」은 남동아시아 개별 국가가 현재의 모습으로 체계를 갖추던 시점에서 남동아시아 주요 작가들의 작품 및 디자인, 교육의 실천을 예시로 전쟁과 독립 이후 남동아시아가 소화한 사회적 문제와 서구 미술 양식을 설명했다. 셍유진의 「남동아시아의 문화전쟁: 1970년대 비판적 전시회의 탄생」은 1970년대 전시사를 중심으로 남동아시아 학생운동(선전적, 좌파적)에 뿌리내리고 있는 예술 집단의 활동과 선언문(메니페스토)이 남동아시아 미술사에서 어떠한 의미인지를 살폈다. T.K. 사바패시의 「남동아시아의 개념미술 읽기: 그 시작」은 1990년대 서구에서 유행한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관계의 미학’, 간학문과 융복합적 기술에 대한 담론이 있었음을 언급하며 텍스트 읽기로부터 개념미술이 남동아시아 내부에서 어떻게 흘렀으며, 이내 개별화되었는지를 언급했다. 리웡초이의 「환유와 은유, 섬과 대륙: 남동아시아 현대미술 큐레이팅에 대한 성찰」은 남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저자 및 예술가들의 과거 자료나 작품, 전시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를 상호 참조해온 역사를 돌아볼 때, 결국 ‘전체적인’ 아시아 미술을 이해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해당 논고들은 현재까지 작동하고 있는 제도가 구축되었던 19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남동아시아에서 생산된 미술과 ‘국제적 사조’의 관계에 집중한다. 동시에 남동아시아 미술은 식민제국이 발전시킨 사조의 아류가 아니라 수용 이상의 번역이었으며, 번역된 자신들의 단어로 만든 문장이었음을 아로새긴다.
2024년 1월부터 4월까지 읽었던 여섯 편의 글은 남동아시아가 형성된 이후 예술가들이 생산한 기록 · 인터뷰 · 현장 사례 분석의 총합이었다. 이들은 회화나 전시 이외의 장르를 연구함으로써 시각예술사의 빈틈을 보완하는 동시에 국가와 공동체 중심의 서사에 기반을 두고 개별의 특수성과 그로부터 자라난 공동의 문제의식을 전달한다. 피비 스콧, 이본 로우, 사레나 압둘라, 스티븐 H 화이트맨의 「새로운 동남아시아 미술사를 정립하며」 · 브리지타 이사벨라의 「우정의 정치학: 인도네시아 현대 미술의 문화 외교, 1950-65」 · 촘촌 푸신파이분의 「전략적 모더니즘: 보드야카라 바라반 왕자의 건축과 전환기의 현대 태국, 1950~1960년대」 · 미셸 웡의 「순환하는 추상: 마닐라에서 홍콩을 전시하기, 1961-82년」 · 멜리사 칼슨의 「체루트 안개 속의 회화: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주의 버마에서의 검열, 1962~88년」 · 타나비 촛프라딧의 「왕국을 재건하다: 태국 고원 지대의 반공 기념물」은 후대의 필자들이 기록을 역사로 정리함으로써 남동아시아 시각예술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 정세의 거울상이었음을 전한다. 특히 홍콩이나 미얀마 예술 공동체의 활동을 서술한 미셸 웡과 멜리사 칼슨의 글은 풍부한 각주로 근래에 기록으로 다듬어진 아카이브와 녹취록의 내막을 보여준다.
물론 정치 · 경제 · 문화적 영향은 식민 제국이 물러난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 계속되었다지만, 태국처럼 중립국으로서의 문화적 긍지를 유지한 나라와 냉전의 이념 중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인도네시아의 정책, 본토와 거리를 유지하며 필리핀 예술가들과 같은 미술 사조를 지탱해갔던 홍콩의 사례는 지금 서울의 한 전시장 안에서 동분서주하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다시 말해, 이는 단순히 리얼리즘과 추상미술의 체계가 어떻게 남동아시아에서 충돌했는지를 넘어서, 20세기의 남동아시아 예술가들이 시사하고자 한 바와 그 미술이 독립적으로 동시대 미술에 미친 영향의 시원을 좇고 있기에 중요하다.
다.
내적 파열로 인해 점으로 흩어진 아시아 예술의 발원지에서 서양 미술은 사조별로 구분된 것이 아닌, ‘서양 미술’이라는 장르로서 수용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동아시아 회화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의 결합이나, 전통문화와 추상이 혼합된 작품은 서양의 사조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 지역의 ‘화(畵)’로서 설명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물론 ‘한국화’라는 절뚝이는 용어의 경우에는 그것의 생성 배경과 용례에 관한 논란이 따라붙게 마련이지만, 소재와 화풍에 관계없이 ‘한국에서 태어난 그림’을 한국화라고 지칭하자고 주장하는 일부 의견을 따르자면 1950년대 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탄생한 작품에 ‘추상’ ‧ ‘리얼리즘’ ‧ ‘유화’ ‧ ‘판화’ ‧ ‘혼합매체’에 관계없이 지역명에 ‘화(畵)’를 붙인 표기가 더 정확한 지칭어가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용어를 바꾸어갈 수 있다면, 이 시대에 생겨난 또 다른 미술의 형태의 유행을 장르로 구분짓는 오류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지는 않을지. 제도에 대한 도전 자체가 남동아시아 미술의 중심적 동력이기에 그 표면에 붙은 표현과 수사가 그 미술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주지시키며 말이다. 가령 개념미술을 논할 때 서구의 개념미술, 동양의 개념미술로 지역과 장르의 명칭을 어느 결과로서의 ‘미술’에 덧붙이게 된다면 당연하게도 위계가 생긴다. 그래서 차라리 ‘어떤 장소에서 탄생한 미술의 명칭에서 개념미술의 면모가 보인다’라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의, 동양의 것도 서양의 것도 아닌 결과물로 미술을 이해할 때 용어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을 절감할 수 있을 테다.
라.
아카이브에 관해 생각한다. 아시아에 기점을 둔 ‘아시아’ 아카이브를 설립하는 행위는 아시아 미술을 선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의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든 간에, 1999년에는 일본이, 2000년에는 홍콩이, 2010년대에는 싱가포르가 남동아시아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기록을 자신들의 물리적 위치로 본격적으로 이관하면서 ‘편향성’에서 벗어나는 아카이빙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물리적으로 시대를 보존하는 집합체이기에 하나의 엉킨 덩어리라 부르는 것이 어쩌면 마땅해서, 이 안에서 남동아시아와 한국 ‧ 미국 ‧ 홍콩 등지에서 발발한 같은 시기의 사건을 함께 두겠다는 목적으로 미술사를 쪼개어 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이때 우리는 떨어진 지대에서 1930-1940년대생 동년배들이 추구했던 이상이 얼마나 상이했는지를 볼 수 있으며 오롯한 아카이브가 없는 개별 인물의 생애와 그가 쌓은 네트워크를 다른 인물의 행적을 통해 발견해갈 수 있다.
약 1년간 들여다보았던 아시아 기관들의 아카이브가 연결하고 있는 과거의 기록을 살피며 아카이브가 때때로 내부 공동체에서 예술의 발전을 견인하는 비평의 부재, 즉 구심점이 되는 미학적 원칙을 제시하지 못했던 미술 공동체의 가치를 사후에라도 추출할 수 있게 하는 통로임을 통감했다. 19세기에 정립된 미술사와 이제 정리가 시작된 미술사의 권력차에 굴하지 않고, 언제든지 아카이브로 몸을 던져야겠다는 다짐도 어떻게든, 굳혀본다.
마.
2023년 11월이 되어서야 ‘자기민속지적’ 글쓰기의 방식으로, 가까운 시각적 표식과 기록물을 살피는 방안에 대해 생각했다. 이는 연구자 혹은 기획자,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시각적 유산에 산재해있는 과거의 시대상을 끌어내는 글쓰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하는 유효한 방법이다. 특히 여성주의적 담화가 내재된 표현이나 공적인 수사로 발표된 빈도가 적은 예술공동체의 역사를 추적할 때에는 지속적인 대화와 관찰이 필요한데, 무의 상태에서 이같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내가 보아온 것,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코드를 기반삼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구멍이 많을지라도 자신이 쥐고 있는 미술사적 지식과 실제로 보고 자란 문화적 규범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는 행위는 무엇이 주류에서 전유되었고, 차용되지도 못한 채 휘발되었으며, 대항의 언어로 간직할 수 있는 이미지는 무엇일지를 파악하는 동시에 걸러내게 한다. 더불어 자기민속지적 글쓰기는 전후 남동아시아 예술가들이 개진한 전략과 매우 유사하게 다른 언어로부터 최소한의 소통이라도 가능케 하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가령, 영어로 주어를, 일본어로는 목적어를, 프랑스어로 서술어를, 중국어로 접속사를 더해 어쨌든 말이 되는 하나의 통사를 써서라도 외부와 대화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외부’, 그러니까 패권을 가진 집단과 국가는 이러한 말하기와 글쓰기 방식을 ‘엉터리’라는 한 단어로 일갈하며 무시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조합되어 어딘가 부족한 언어로라도 계속 서사를 노출하는 것만이 주변에 머물러온 현대미술사의 입지를 강화할 방법이라고, 나 역시 믿는다. 비평의 주체가 언어로 발화되지 않은 내부 정체성과 갖가지 원흉을 관찰할 때, 그럼으로 외부의 이념과 자본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기억을 형성하는 서술을 수행하는 동안에야말로 다른 지점으로 뻗어가는 예술론의 가지가 탄생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동아시아 미술을 공부할 때에도 말하기와 글쓰기, 남은 문장을 모으기를 하나의 전술로 상정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일례로, 낙원의 전형을 대표하고 있는 휴양지인 발리에서 나는 인도 문화와 발리의 문화를 구분짓는 일상적 행위를 묘사한 그랩 운전기사의 말을 기억하고 이를 지면에 기록했다. 물론 영어라는 제국의 언어로 나눈 대화였으나, 문화적 종주국과 생활의 관습을 분리하는 선은 그의 발화에서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말, 간단한 영단어의 조합에서부터 문화적 식민상태로부터 개인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지와 그 거리가 미미하다는 이유로 하나의 ‘휴양국’으로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비교의 방식은 비로소 시점의 균형을 맞추게 해주며,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틈 사이에 잠입할 수 있게 한다.
민속지학적인 연구 방법은 공동체에서 발화될 수 있는 긍정과 부정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둘을 동시에 경험하고 기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도 필수적인 연구 방법이다. 특히 외부와의 소통이 적은 집단일수록 연구 대상과의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나는 이를 취재와 저널리즘의 일차적인 발판으로, 비평과 역사를 발생시키는 실무자들이 택하기를 각오해야 하는 방법으로 이해했다. 잔상 쫓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현장 취재와 입말을 채록하여 추정이라도 발생시켜서 진실에 바짝 다가서라는 계율을.
바.
회화와 조각에서 나아가 국가 주도의 시각문화에 포함되는 무빙 이미지에서도 아시아 개별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표는 조금씩, 전부 다르다. 2020년 싱가포르 목판화 연구를 위해 현지 숙소에서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인종과 문화의 화합이 아직 설익었음에도, 총체적인 정체성을 지향하며 ‘국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포섭하기 위한 국가적 캠페인이 진행되는 일상적 풍경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태국과 같은 ‘왕국’이 아니어도, 국민국가와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공동체를 규합하는 이미지였음을 깨달은 시점은 그로부터 약 3년 정도 흐른 뒤였다. 배운 바가 적어 본질을 늦게 깨달았음을 재확인할 때의 촉각적 통증과 함께, 지하철에서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에티켓 영상이 반복된 그날의 기억도 계속 후술해가도록 하자. 싱가포르의 지하철에서는 ‘전형적인’ 중국계 여성 노인에게 단정한 하얀 셔츠를 입은 ‘전형적인’ 인도계 남성이 좌석을 양보하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단일민족’으로 자라난 내게 지하철에서 의도적으로 연출된 ‘전형적인’ 외형으로 다양한 민족 구성원을 공동체로 규합하려는 영상은 새삼 신선했는데, 이는 구축된 지 약 반세기밖에 되지 않은 국가가 내부적 문화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인종적 다양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한국 역시 곧 해내야 할) 갈등 해결 과제의 선례로 이해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는 실제로 이러한 문화적 정책으로 유지되고, 유지되어갈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통감하지 못하는 큐레이토리얼 실천으로는 아시아성을 꿰뚫는 논의를 전개하기 어렵다.
민족적 다양성에 대하여 다면적으로 지식을 쌓지 못한다면, 아시아 미술에 대한 유의미한 비평과 전시 형성 역시 근본적으로 어려워진다. 공통을 지향하는 것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다면성이 아시아의 근본적이며 모순적인 특색일 것이다. 이미 상징과 물질과 돈이 엮여 있고, 각각의 아시아, 각각의 아시아인이 필요에 따라 이를 기반으로 공통된 감각을 창조해낸 것임을 잊지 않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유산이자 숙제다.
사.
전쟁 이후 남동아시아는 타국의 이념과 장르적 유행을 10년에서 20년 단위로 소화하면서, 그들의 전쟁터와 휴양을 제공하는 동시에 개별의 국가적 정체성 정립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소화해냈다. (현재로서는 다크 투어리즘의 장소까지도 내어주고 있다.) 우리는 이 시기의 아시아를 지역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당시 이산을 겪었거나, 이주를 선택했던 개별 인물이 펼친 조형실험 역시 ‘아시아 또는 아시아로부터 온 것’이라 여긴다면, 비난이든 관심이든 간에 아시아는 무척이나 다중적인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거대한 점조직이 된다. 역으로 짚자면,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다르듯 태국과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와 버마와 베트남의 정체성과 그들이 선택한 말하기 방식이 모두 상이하다는 말이 된다. 가령 개별의 아시아와 아시아 예술가들이 ‘추상’을 그들의 언어로 채택했다고 해도, 이는 엇비슷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국제적인 힘의 균형이 영미권에 쏠려 있기에 오역된 또다른 언어이므로.
물론 애석하게도 추상과 리얼리즘, 개념미술의 전달과 유통의 기저에는 영어와 달러가 갖는 우위가 분명해서, 현재 유통되는 주된 언어와 화폐 개념을 따라가지 못하면 이 다양한 아시아는 스스로를 ‘아시아’로 공표할 수조차 없다. 외부로 향하는 이같은 발화가 이루어지려면 지식의 습득은 필수적인데, 이때 지식은 상당수 달러로 거래된다. 내게 밀접한 예시를 들자면, 현재 많은 도서 및 아카이브 등록 시스템이 채택하고 있는 국외서 구입 가격 화폐 기준의 첫 번째 옵션은 미국 달러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해외 저자의 논문을 PDF로 구매할 때에도 달러를 기준으로 원화의 가격이 책정된다. 이에 더해, 주류 미술계와 미술관을 고객으로 상정하고 있는 미술시장 안에서 영어보다 모국어의 인지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식한 이후 개별의 아시아가 취한 전략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출판물 등록 시스템으로 돌아오면, 국외서의 언어 설정 옵션창에서 선택할 수 있는 언어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는 점도 성찰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양성을 포용하고자 하는 기관의 바람과는 달리, 서지등록 담당자는 영어 · 프랑스어 · 러시아어 · 네덜란드어 · 중국어 · 일본어 정도만을 선택할 수 있다. 더불어 아시아에서 모국어를 사용해 ‘출판가능한’ 도서를 제작할 때, 영문을 병기하는 경우 외에도 그들은 모국어의 폰트 디자인을 디지털 시스템이 오류 없이 인식 및 출력할 수 있는 형태로 개발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민간에서도 각국의 언어, 그리고 개별 국가 내부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형상은 다양한 영어의 서체와 유사한 형태의 그래픽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이는 자국과 타국의 미술제도 안에서 아시아에서 생산된 작품과 미술 자료를 영구적인 컬렉션에 편입시킬 기회를 높이려는 시도로 보인다.
아.
『100 Artists’ Manifestos: From the Futurists to the Stuckists』(2011, Penguin Classics)에 실린 미술 선언문 중,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글은 구타이 그룹의 요시하라 지로를 주필로 한 「구타이 미술 선언문」(1956)과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 메니페스토」(2000)가 전부다. 그러나 셍유진의 글 「남동아시아의 문화전쟁: 1970년대 비판적 전시회의 탄생」이 언급했듯, 1909년 ‘미래주의’의 활동부터 2000년까지를 포괄하는 시점에 남동아시아에서는 여러 미술 선언문과 그것으로부터 창발된 단체와 운동이 있었다. 이 때 비평적 전시와 선언문은 반권위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을 띠기도, 미술 단체를 넘어선 문화 생산의 의무를 명시하는 변화의 운송 수단이기도 했다.
1975년 태국 예술가 전선의 「태국 예술가 전선 선언문(Manifesto of the Artist Front of Thailand)」(1975)과 1959년 홍콩 현대문학예술협회 선언문은 강렬한 예시다. 순수함과 견고함을 지향하는 모더니즘적 태도인 선언문 제시에는 외부적 기준을 수용했던 당시의 젊은 세대가 마주한, 짧은 발전사도 단계를 나눠 외부를 설득하겠다는 논조가 스며들어 있다. (이 때문에 선언문은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더불어 미술의 원칙을 문장으로 고정한 글 역시 찾아볼 수 있다. 림학타이가 『젊은 말레이시아인의 예술(The Art of the Young Malayans)』(1955)에서 제시했던 6개의 계율과 아낙 알람(Anak Alam, 1974)의 명시한 예술과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볼 때에, 나는 남동아시아 미술이 어떠한 기조로 부피를 넓혀왔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자.
남동아시아에서 전시란 무엇이었는가? 1900년대 초반 다수의 남동아시아 국가들의 ‘살롱형’ 전시는 식민 당국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후 거대 규모의 전시를 개최한 주체는 각국의 독재 정부와 친서방 정권이었다. 살롱형 전시는 예술가들을 동원해 국가적 문화의 융성함을 외부에 홍보하는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전시는 프레임워크인 동시에 미술 현장을 만드는 행위다. 이러한 전시의 역할은 1960년대 이후,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예술 실천과 사고가 미술계에서 더욱 중요해진 시점, 요컨대 그들이 예술가의 철학과 문화적 수요자 사이를 매개하던 시기에 남동아시아에서도 부상했다. 우리는 현장을 만듦으로서 남동아시아 미술의 담론을 생산시킨 기념비적인 인물들이 목표한 끝점에 무엇이 매달려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부정하는 것일 수도, 긍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학과 예술은 국가와 민족의 상태이기에 어느 논의에서도 제외할 수 없다. 남동아시아가 전시를 소통의 창구로 사용했든, 국가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든 간에, 이는 지식을 전파하고 소통하는 매개물이자 근본적인 자리였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각국의 정부는 이같은 전시의 속성과 이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차.
리얼리즘의 언어에서 잠시 떠나 남동아시아에서 추상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폈다. ‘너희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는 우리 전통에도 너희의 언어를 섞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방법이었던 추상은, 혼돈 자체였던 전후 아시아에서 배출한 또 하나의 걸출한 혼종이었다. 직관적인 감상에 의지해 새로움을 추구하려 했던 추상미술가들이 행한 아시아 안에서의 교류는 이쪽 아시아의 모더니즘과 저쪽 아시아의 모더니즘이 만나는 가교이기도 했다.
한편, 추상은 판매와 수출의 전략이기도 했다. 추상회화에 몸담았던 1930-1940년대생 홍콩 예술가들은 어떻게 우리를 식민지 삼았던 영국 관람객들에게, 그들의 시각문화에 더 친숙한 방법으로 내부 공동체의 이야기를 전송하면서도 이윤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독재 정권이 기세를 펴고 있는 타국의 상업 화랑에서 자신들이 취한 현대적 실험을 걸어낼 것인가를 질문했을 것이다. 이같은 교류사는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렸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의 사례 역시 떠올리게 했다.
남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공립 미술관이 자신들의 소장품으로 기본적인 살롱형식의 추상미술전 다시 열 때, 우리는 추상을 주체적인 번역어로 바라보고자 하는 기획자들의 염원을 느낀다. 소장품으로 구성한 전시는 당시 미술관이 판단한 시의성과 미적 체계를 갖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고, 그 요소인 작품에는 당연히 미술관에 수집된 시기의 미감과 공동체가 긍정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을 테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작가뿐만 아니라 화랑을 거쳐서 미술관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언제나 시장에서의 자유를 확보해왔던 양식이자 당시의 시장에서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고, 지금도 아주 활발히 거래되는 작품들의 공통점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 공통분모에는 예나 지금이나 추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다. 물론 이 시기 무비판적으로 재료와 소재를 쉽게 혼합해버린 실수, 가령 먹을 뿌린 뒤 ‘동양적 추상’이라 이름붙여 자신을 마구 팔아댄 추상의 죄목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되겠으나, 당시 추상화가 구축한 아시아 내외부의 우호적 관계와 국제적 네트워크를 얕잡아 보는 일도 반성해야 함을 깜빡하는 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카.
누락된 부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매일, 연구자들은 여성 예술가들이 검색값이 되지 못할 때에 “끝끝내 여자”인 이들이 “제국의 통치를 경험한 혹은 경험하는 국가들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 가설무대 곁에서 맡은 것처럼 값싸고, 날것이며, 가벼운 휘발성의 냄새. 날림 공사로 세운 벽에서 솟아오르는 시멘트 가루의 냄새”(『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19, 김혜순, p.27) 속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거나, 시대적 선택에 의해 작품의 존재감이나 이미지가 흐려졌다는 실상을 만난다. 그리고 여성을 배척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의 땅’이라는 국가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공동의 기획에 몸서리친다. 남동아시아가 자국의 이미지 생산과 구현을 위해 예술가들을 동원했을 때, 당연하게도 여성 예술가들도 이에 기여했으나 그들의 존재는 역사적 서술 안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이다. 나아가, 성차별과 종교는 누드와 같은 미술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이자 탐구 과정에도 여성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인본주의적인 미술의 소재뿐만 아니라 작가의 내면 탐색에까지 제동을 걸었던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와 여타의 신을 추앙하는 종교는 여성간의 창의성을 연결하지 못하게 제약했다.
우리가 엘리트들의 기록을 읽고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엘리트 집단의 성향에 대해 언제나 반박할 수 있는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와 그 반대의 태도는 매우 다른 결의 읽기 과정을 초래할 것이다. 그 안에는 성차별적 시각뿐만 아니라, 추정컨대 지원과 우호의 명목으로 가장한 뇌물이 있었을 테고 전시 개최를 위해 발생된 사회적 비용이 은닉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걸린 작품을 비용을 내고 수집한 이들도 있었을 테다. 이 사이에서 후대 연구자는 학습된 무력감 안에서 누락된 작가들이 그려냈던 어휘를 발견하고, 국가 내부에서는 저평가되었을지라도 그들의 지위를 복권시키는 보고서 상술의 의무가 있다. 앞의 문장을 곱씹는 오늘의 나 역시, 비닐로 뒤덮인 서울의 복판을 달리는 여자로 사는 중이다.
타.
10개의 논고에서 나아가 20세기 전반 한국을 포함한 남동아시아에서 생성된 무빙이미지 및 기록물, 기억을 형성하는 이미지 “리믹스”하기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그리고 AS의 일원으로서, 내가 해가고자 하는 탐구의 방향성을 기록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국공립 미술관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온 서사를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며 물렁한 제도 안에서 그 골자를 다시 엮는 일, 그것이 앞으로의 목표다.
그 과정은 근과거의 미술 교류 사례연구와, 축적된 국내외 미술 아카이브에 도큐먼트로만 남아있던 한국 · 호주 · 일본 · 남동아시아 예술가들간의 상호작용을 참조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동남아시아 시각예술사 발전에 일본을 거친 미술용어의 번역과 수용이 있었다는 점, 1941-1942년 일본 식민 경험을 공유하는 베트남 · 캄보디아 · 라오스 · 싱가포르 · 인도네시아 · 미얀마의 자국 미술사 서술 방식과 일본 미술관들이 아시아 미술을 수집하고 기획전의 주제로 내보이는 방법의 차이가 존재했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역으로 패권국가인 일본에서 아시아미술을 수집하고 서술한 결과 위를 걸어보고자 한다.
한편, 아트 바젤과 프리즈 등 거대한 미술시장이 홍콩과 (내부적 주장에 따르면) 서울에 주목하며 남동아시아 예술계 안에서 몸집을 불려가고 있지만, 시장 형성의 기저가 되는 시각문화와 작품 탄생의 맥락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시장이 외부 주체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남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자국 근현대미술에 관한 작은 집단간의 지속적인 토론, 가까운 국가간의 문화적 연결망 존립을 장기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남동아시아 오역하기: 7개의 구멍》 이후, AS가 디지털 기반의 텍스트와 이미지에 의존해왔던 연구의 빈칸을 채우고, 실무자로서 연구 활동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한 이들의 입말을 통해 현장성을 기록할 수 있는 괄목할 만한 계기를 찾기를 바란다. 이로써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미술 내부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의 전개 방향을 맨몸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아시아 미술 담론에 휘발되지 않는 지속적인 생각을 주고받는 말랑한 그릇이 되기를 소원한다.